성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전쟁의 중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중세와 근세 유럽·아시아에서는 성을 둘러싼 공성전이 전쟁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때로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계 고성 중 실제 역사적 전투가 벌어졌던 대표 사례를 3가지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프랑스 카르카손 성채: 백년전쟁 속 철옹성의 역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카르카손 성채(Cité de Carcassonne)는 유럽 중세 성곽 건축의 정점이라 할 만큼 견고하고 거대한 성으로, 백년전쟁(1337~1453) 동안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군사적 충돌의 핵심 전략 거점으로 기능했습니다.
카르카손은 로마 시대부터 방어 요충지로 사용되었지만, 특히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남부를 방어하는 최전선 성곽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토루즈, 아키텐 지방을 장악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카르카손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카르카손 성은 2중 성벽, 47개의 망루, 해자, 내성 구조 등 다중 방어 시스템으로 철저히 방어되어, 적의 공성전 시도에도 불구하고 뚫리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은 우회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프랑스인 저항이 길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카르카손은 지역 주민들의 자치적 민병대가 조직되어 자체 방어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파견한 병력뿐 아니라, 농민·상인·수공업자들이 성벽 위에서 활, 석궁, 끓는 기름 등을 동원해 싸웠으며, 이는 지역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카르카손은 쇠퇴했지만, 19세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복원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당시 전투의 흔적과 중세 전쟁 구조를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 성: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의 결전
오사카 성(大阪城)은 일본 전국시대 말기 최대의 전투 중 하나인 오사카 전투(오사카의 진, 1614~1615)의 중심지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막부 간의 일본 통일을 건 전쟁이 벌어진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재건된 오사카 성은 일본 서부 세력의 최후 보루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제거해야만 완전한 전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1614년과 1615년, 2차례에 걸쳐 오사카 겨울 전투(동계)와 오사카 여름 전투(하계)가 펼쳐졌습니다.
오사카 성은 당시 가장 강력한 성곽으로 평가받았습니다. 3중 해자, 두꺼운 성벽, 견고한 천수각과 군사 창고가 정비되어 있었으며, 내부에는 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과 민간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차 동계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성벽 바깥까지 진입했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화의로 일단락되었으나 성의 외곽 방어를 철거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측이 다시 재무장하자, 도쿠가와는 다음 해 여름 재공격을 감행해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켰습니다.
오사카 전투는 일본 내에서 가장 치열하고 전략적으로 복잡한 성 전투로 손꼽히며, 오사카 성은 이후 도쿠가와 정권 아래 새롭게 재건되었습니다. 현재 오사카 성은 전쟁의 상흔과 근대화된 일본 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당시의 전투 상황을 재현한 체험관도 인기 관광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호헨잘츠부르크 성: 포위전의 상징
호헨잘츠부르크 성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고지대 성곽 중 하나로, 중세와 근세를 아우르며 수많은 전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16세기 독일 농민전쟁(1525) 당시 이 성은 농민 반란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잘츠부르크 지역은 대주교령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성직자 귀족들의 착취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대주교의 본거지인 호헨잘츠부르크 성을 공격했지만, 이 성은 높은 산지 위에 자리 잡은 까닭에 공격이 극도로 어려웠고, 결국 농민군은 성벽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포위전으로 전환했습니다.
호헨잘츠부르크 성은 당시 자급자족이 가능한 성이었으며, 내부에 식량 저장고, 우물, 무기고, 군사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어 장기 포위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당시 다른 유럽 성들과 차별화된 구조적 특징이었고, 오랜 시간 전쟁 없이도 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농민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호헨잘츠부르크 성은 귀족 권력의 우월성과 정치적 상징물로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이후 17세기에는 30년 전쟁 중 방어 거점으로도 활용되었으나 실제로는 함락된 적이 거의 없는 “무패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성은 잘츠부르크 도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관광 명소이자, 전쟁 건축물로서의 방어성과 전략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계의 성은 그 자체로도 역사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진 전투와 포위전, 저항과 함락의 순간은 국가의 운명을 뒤흔든 결정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